2024.05.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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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문화탐방] 오누이 공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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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문화탐방] 오누이 공원을 찾아서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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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지나고 설 명절을 며칠 앞둔 2월 초순, 코로나의 습격을 피해 기어드는 봄의 기운을 만나러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의 오누이공원을 찾았다. 긴 추위 끝의 포근함…,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삼한사온(三寒四溫)의 기온이 저절로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오누이공원은 이름 그대로 청도의 유명한 시조시인인 ‘이호우 이영도 남매시인’을 기념하는 공원으로써 동창천과 청도천(한제천)이 밀양강과 만나는 지점인지라 물길이 주는 상쾌함과 자연이 내뿜는 신선한 향기로 더할 수 없는 운치를 만끽할 수 있었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작은 소담한 정원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공원길을 걸으며 이호우 시인의 ‘살구꽃 핀 마을’과 이영도 시인의 ‘달무리’ 시비(詩碑)도 읽었고, 삼기정(三岐亭) 정자에 올라 느리게 다가서는 봄기운과 대화도 나눴다. 문득 청도로 귀촌하기 전, 부산 초량동 이바구길에서 만난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곳 유치환 카페 모퉁이에 걸려있던 이영도 시조시인의 사진…, 그제야 이영도 시인의 고향이 이곳 청도였음을 새삼 인지한다. 시조시인으로서 우리의 고유가락을 재현해 현대시조로 정착시켰다는 평을 받는…, 참으로 단아하고 아름다운 신여성이란 느낌을 받았던 여인!

문학적 재능과 미모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가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근무할 때 청마 유치환 시인을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

당시 유치환은 38세 유부남이었고, 이영도는 30세로 21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를 키우는 미망인…, 어쩌면 유치환과 이영도의 만남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영도를 만난 후 20여 년 동안 유치환은 거의 매일 편지를 보냈으며, 이영도를 향한 그의 사랑은 그가 쓴 그리움의 시편에 절절이 녹아들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 바람 센 오늘도 더욱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그리움 1 / 유치환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2 / 유치환 -

 

청마는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는 파도를 보며 사랑의 절규를 바치지만, 정운은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아걸고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청마는 하루도 쉬지 않고 시와 편지를 썼고,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이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을 서서히 녹인다.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울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그리움 / 이영도 -

 

정운의 시를 받은 청마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현실의 사랑을 한 단계 초월하여 ‘받는 것보다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행복’이란 시로 승화시킨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려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럼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 유치환 -

 

이 시에 대해 정운의 답신은 ‘무제’였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 무제 / 이영도 -

 

이 시를 통해 정운도 청마에 대한 사랑을 퍽이나 용감하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20여 년 동안 무려 5,00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단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던 이영도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유치환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부산여상 교장으로 재직하던 1967년 2월 13일 저녁, 예총 일로 문인들과 어울린 후 귀가 중 시내버스에 치여 5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음으로써 끝이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의 사랑은 끝을 맺는다.

청마가 죽은 후 이영도 시인은 ‘탑(塔)’, ‘모란’, ‘황혼에 서서’ 등 그리움의 시를 통해 청마를 잃은 마음을 절절이 담아낸다.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애절한 사랑의 시편들은 6.25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남은 편지들을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고,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어울림이었기에 퍽이나 고통스러웠던 두 사람의 플라토닉 사랑은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해진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도 같고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입춘지절(立春之節)에 오누이공원을 찾아 청도를 대표하는 ‘이호우 이영도 남매시인’을 만났다는 건 개인적으로 크나큰 행복이었으며, 시인의 길을 걷는 나의 입장에서도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앞에서 ‘이런 애틋한 사랑 한 번쯤 해봤으면…’ 하는 솔직한 욕심을 숨기지 못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며 그 절절한 마음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진중한 자세와 애틋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 깊이 생각하게끔 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공원과 가까운 곳에 등록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된 근대기 한옥기와집인 시인의 생가(生家)가 있다고 했으나 별도의 안내가 없어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빠져나오는 길목 어귀의 ‘시조공원’에 들러 남매시인과 함께 박재삼, 정완영, 이근배, 김남환, 민병도,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 김상훈, 김상옥, 이우종, 최승범, 류상덕, 박재두 등 16명의 시비(詩碑)를 감상할 수 있었음이 나름의 수확이었다.

청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오누이공원을 찾아 ‘유치환 이영도’ 두 사람의 플라토닉 사랑을 음미하고 시조공원의 시비(詩碑)를 통해 고급스런 문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길 권한다. 권규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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